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미셸 푸코 (문단 편집) === 문화원장 === 그 계기는 마침 [[스웨덴]] [[웁살라 대학교|웁살라 대학]]에서 프랑스어 강의를 맡아줄 사람을 구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프랑스어 강사는 동시에 이 작은 대학 도시에 오래전부터 있는 소규모의 문화원을 운영하는 책임도 맡고 있었다. 이 문화원의 기능은 다른 모든 문화원과 마찬가지로 강연, 토론, 오락 활동 등을 통해 프랑스의 문화와 언어를 현지 국민들에게 알리는 것이었다. 푸코는 인도-유럽 신화학의 대가인 조르주 뒤메질을 통해서 이 자리를 추천받았다. 답답했던 프랑스를 벗어나고 싶었던 푸코는 이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래서 그는 1955년 스웨덴 프랑스 문화원장 자리에 부임한다. 이때 푸코는 28세밖에 되지 않았다. 푸코의 기대와는 다르게 스웨덴에서 보내게 될 3년간은 그에게 매우 어려운 시간이었다. 그는 [[스칸디나비아 반도|스칸디나비아]]의 살을 에는 듯한 겨울 추위를 견디기 힘들어했다. 푸코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나는 20세기의 [[르네 데카르트|데카르트]]다. 나도 여기서 죽을 것 같다. 다행히도 크리스티나 여왕이 없을 뿐이다." [* 디디에 에리봉 『미셸 푸코, 1926~1984』 박정자 옮김, 그린비출판사, 2012, p.135] 심지어 겨울에는 오후 2~3시만 되면 해가 졌다. 푸코가 보기에 그 도시는 우울해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점차 새로운 생활에 적응해 갔고 그럭저럭 생활을 즐길 수도 있게 되었다. 하루는 차를 한 대 구입하기 위해 스톡홀름으로 나서서, 베이지색의 멋진 [[재규어(자동차)|재규어 차]]를 한 대 사 가지고 돌아왔다. 그것은 검약에 익숙해 있는 웁살라 사회를 깜짝 놀라게 만든 사건이었다. 엄격한 대학사회에서 가장 말단에 위치한 강사가 이처럼 부를 과시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집은 제법 잘 살았고 집에서 계속 푸코를 도와주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돈이 없는게 아니었다. 그리고 푸코는 결코 금욕주의자도 아니었다. 그는 스피드를 즐겼으며 미친듯한 운전을 했다고 전해진다. 그의 재규어는 그를 아는 모든 웁살라 사람들에게 하나의 전설이 되었다.[* 디디에 에리봉 『미셸 푸코, 1926~1984』 박정자 옮김, 그린비출판사, 2012, p.140~141] 그렇다고 자신의 일에 소홀히 했던 것은 아니다. 아니, 푸코는 문화원장의 일에 온 정력을 다 바칠 정도로 일했다. 그는 문화원에 여러가지 프로그램을 도입하였으며, 강연과 영화상연, 심지어 연극을 하기도 했다. 연극에서는 해설뿐만이 아니라 직접 공연에 참가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알베르 카뮈|카뮈]]가 1957년 노벨문학상을 받으러 스웨덴에 왔을 때, 푸코는 문화원장으로서 그를 맞이하는 역할을 맡았다. 문화담당 참사관은 상부에 올리는 보고서에서 "푸코는 일반 문화강좌에서 훌륭한 강연회를 개최하는 것으로 명성을 날리고 있으나, 그 모든 일을 혼자서 성공적으로 수행하느라 일에 짓눌려 그의 건강이 글자 그대로 죽어 가고 있지 않는가 걱정이 된다"고 말할 정도였다. 동시에 푸코는 웁살라에서 박사학위논문을 준비했다. 그 유명한 『광기의 역사』가 바로 그것이다. 그는 쓰고 또 썼으며 밤에도 계속 썼다. 항상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바흐]]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모차르트]]의 음악을 들으면서였다. 논문이 거의 완성되었을 때, 박사논문 제출을 위해 푸코는 웁살라 대학의 영향력 있는 교수인 린드로트 교수에게 자신의 원고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 교수는 견실한 실증주의자였으므로 난해한 사변과 문학적 문체에 별로 너그럽지 못했고 그 논문을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래서 푸코는 결국 웁살라에서 박사논문을 제출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아마도 이것이 푸코가 스웨덴을 떠나기로 결심한 이유였을 것이다. 나중에 스웨덴에서 논쟁이 벌어졌는데, 린드로트 교수는 천재의 징후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비난을 받게 된다. 그 논문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여하튼 푸코는 박사학위를 받기 위해 몇 년을 더 기다려야만 했다. 마침 프랑스 정부는 [[폴란드]] [[바르샤바 대학교|바르샤바 대학]] 내에 프랑스 문화원을 설치할 계획을 세웠고 프랑스어 강사가 한명 필요했다. 푸코는 여기에 신청했고, 그 전 업무평가가 워낙 좋았기 때문에 푸코는 그 자리를 맡게 되었다. 여기서도 그는 폴란드 구석구석에서 벌어지는 문화행사에 일일이 참석하는 등 헌신적으로 일했다. 하지만 이런 와중에 일이 터져서 푸코는 급히 폴란드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얘기는 복잡하지만 어찌 보면 동구권 국가에서는 매우 흔해 빠진 일이었다. 푸코는 한 소년을 만나 이 숨 막히고 우울한 나라에서 잠시 행복한 나날을 살았다. 그러나 이 소년은 서방국가의 외교가에 침투한 경찰의 끄나풀로 밝혀졌다. 어느 날 아침 푸코는 프랑스 [[특명전권대사|대사]]로부터 폴란드를 떠나라는 명령을 받았다. "언제요?"라고 푸코가 물었고 "지금 당장"이라고 대사가 말했다. 그렇게 떠났음에도 그를 격찬하는 보고서가 뒤에 남았다. "명석하고 빈틈없고 날카로운 두뇌와 깊은 학식을 가진 푸코는 행정 감각마저 가지고 있다." 이후 [[함부르크 대학교|함부르크 대학]]의 프랑스 문화원을 잠시 운영했고, 그곳에서 마침내 박사학위논문 『광기의 역사』를 완성한 푸코는 1960년 다시 프랑스로 돌아온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